다분히 평범하고 익숙한 이미지들이 보인다. 내 삶과 주변에 있을 법한 일들과 사물을 비롯해 어디선가 보았음직한 장면들이다. 그런데 있을 법한 것들과 보았음직한 장면들이라고 하여 무심하게 넘어갈 만하지가 않다. 제목도 내용도 없는 두꺼운 책에 심취한 사람이나, 무심하게 놓여진 가위가 나를 뾰족하게 보는 듯한 느낌은 쉬이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들도 있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 예고없이 찾아오는 사건들로도 가득한 것이 우리 삶이고 일상이다.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근거한 부정적 심리상태(통칭 불안)를 다루거나 해제하는 방법은 제각각 이겠지만, 이수진은 이러한 현실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을, 유사한 감정을 일으키는 영화(특히 공포영화) 속에서 일상의 모습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이를 작은 화면 속에 박제하듯 그려내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마주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누구나 갖고 살아가는 다양한 불안의 감정이 익숙한 듯 낯설거나, 평범한 듯 어딘가 달라 보이는 이미지들을 통해 소환되지만, 이수진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감정이 증폭되기보다 떠오른 그 감정을 한 걸음 물러서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번 전시 <일종의 평화>는 불안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난 작업들과 흐름을 함께하지만, 영화나 미디어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조금씩 벗어나 작가의 내면을 거쳐 걸러진 이미지들에 집중하면서 좀 더 평범한 일상의 모습과 가까워져 있다. 적극적으로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 혹은 ‘과정'에 중심을 두었던 것에서 나아가, 부정적 감정의 완화를 통해 이와 공존하는 법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신작들을 살펴보면, 영화적 모티브를 강하게 연상시키던 지난 작업에서의 날카로움은 한결 부드러워졌으나 평안함 속 긴장감과 같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일게하는 힘은 더욱 커지고, 모호한 기시감은 옅어진 반면 일상과 더욱 밀착한 소재들은 보는 이들이 오히려 그림에서 불안의 심상을 공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유머러스하게 읽어내도록 한다.
바라지만 얻을 수 없는 평화를 기원하는 듯 고요히 타오르는 촛불로 시작하여, 화면에 가득 한 기다란 날의 가위, 곧 떨어뜨릴 듯 불안하게 케이크를 먹는 손길 등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모습과 사물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 정지화면처럼 우뚝 선 간판, 무언가를 목격했을 것만 같은 흰 셔츠 위 선글라스, 목적지를 잃은 듯 멈추거나 하염없이 가고 있는 자동차 등 바깥 풍경의 이미지들을 지나면 화재의 긴장감과 소멸의 승화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불이 우리를 맞는다. 그리고 마치 지금의 불안과 두려움 또한 언젠가 끝이 날것이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은유하며 마무리된다.
처음으로 전시되는 색연필 및 연필 소품들은 수집한 불안의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만의 방식을 색다른 각도로 보여준다. 이들은 유화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밑작업처럼 시작해서 때로는 그대로 밀도있게 완결되기도 하고 캔버스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는데, 특히 흥미로운 점은, 재료와 표현의 차이로 인해 동일한 불안의 심상도 조그맣고 부드럽게 그려지며 마치 ‘불안의 썸네일'처럼 위트있게 읽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인 일상의 이미지 아래 강박적인 듯 무심하게 깔려 있는 불안에 대한 이수진의 담담한 시선은 각 개인의 삶에서 서로 다르게 연상되는 사소한 불안의 이미지를 끌어내고 자연스러운 공감의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이 없어질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불안 속에서 나에게 잠시나마 안정, 평화를 주는 것들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나에게 ‘일종의 평화’라고 느낀다.”는 작가의 말은 불안과 안정, 확신과 불확신, 평온과 긴장, 혼란과 질서 사이를 하루하루 시소 타듯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